[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14일에 의금부가 이목의 집을 수색하여 발견한 임희재(任熙載)의 편지를 읽은 연산군은 “그 아비 임사홍(任士洪)이 소인으로서 금고(禁錮)를 입었는데, 이 사람도 역시 그렇단 말이냐. 아울러 그 아비까지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전교하였다.

조선 시대 간신의 대명사로 낙인찍힌 임사홍(1445∼1506). 그는 금수저였다. 아버지는 좌리공신 임원준, 아내는 효령대군(1396-1486)의 손녀였다. 1)2) 또한 네 아들 중 큰 아들 임광재는 예종의 딸인 현숙공주에게 장가들어 풍천위(豊川尉)가 되었고, 넷째 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딸인 휘숙옹주와 혼인하여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이렇게 임사홍의 집안은 왕실과 중첩적인 혼인을 맺은 부마 집안으로써, 권력의 핵심을 맴돌았다.

임사홍은 20세인 1465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승장구 했다. 특히 서예 솜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성종은 임사홍을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 ·우승지(1476년), 좌승지(1477년)로 근무하게 하였고, 1477년 8월에는 대사간, 10월에는 예조참의, 1478년 1월에는 이조참의로 임명했다.

그런데 1478년(성종 9년) 4월1일에 흙비[土雨]가 내렸다. 성종은 즉시 승정원 관리들을 꾸짖었다.

"흙비가 내렸으니 천견(天譴)이 가볍지 아니하다.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인데, 경등은 어찌하여 한 마디 말도 없는가?"

도승지(都承旨) 신준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은 단지 날씨가 흐린 것만 보았고 흙비가 내리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알았다면 어찌 감히 아뢰지 아니하였겠습니까?"

(성종실록 1478년 4월1일 2번째 기사)

이 날 성종은 재이(災異)의 이유와 해결방안에 대해 널리 의견을 구하라고 의정부에 지시했다. (성종실록 1478년 4월1일 3번째 기사)

“지난달에는 지진(地震)이 있었고 이 달에는 흙비가 내리니, 재변(災變)이 오는 것이 무슨 까닭인가? ... 허물은 실로 내게 있는 것이므로 직언(直言)을 들어서 천견(天譴)에 답하고자 하니, 대소 신료와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재이(災異)를 일으킨 이유와 재이를 그치게 할 방법을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라."

4월7일에 경연을 마치자, 대사간 김자정과 사헌부 장령 박숙달이 아뢰기를, "금주(禁酒)와 기생을 데리고 잔치하는 것을 금하게 하소서."하였다. 성종은 이런 금지가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좌우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한명회와 노사신이 성종의 의견에 찬동했다. 이러자 대사간 김자정과 장령 박숙달이 금주령(禁酒令)을 마땅히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날인 4월8일에 성종은 도승지를 신준에서 임사홍으로 교체했다. 임사홍은 나이 33세에 요즘 같으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것이다.

사진=성종 왕릉 ( 선릉, 서울시 강남구 소재)
사진=성종와 정현왕후 비각

4월8일에 효령대군의 증손자인 이심원이 상소를 올렸다. 성종의 구언에 답했는데 권세가문은 이익 챙기기에 바쁘다고 하면서 세조의 공신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4월15일에는 성균관 유생 남효온이 근래의 변고는 소릉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를 파헤쳐서 그렇다면서 소릉복위상소를 올렸다. 세조 이래 금기(禁忌)인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4월21일에 사헌부가 성종에게 보고했다.

"요즘 흙비와 지진이 있었고 성 안에 불이 나서 수백 집이 연소(延燒)되었으니 재변이 이상하고, 또 가뭄의 징조가 있으니 모름지기 상하(上下)에서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여야 할 것이므로, 늙고 병들어 약으로 먹거나 혼인과 제사 외에는 일체 술을 금하여 천견(天譴)에 답하게 하소서." 하였다. 금주령을 건의한 것이다.

성종은 사헌부의 의견에 그대로 따르되, 부모의 헌수(獻壽)와 백성 다섯 사람 이하가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하지 말도록 하였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21일 3번째 기사)

그런데 이 날 도승지 임사홍이 이의를 제기했다.

"신이 듣건대, 경연에서 대간들이 금주를 건의했다고 하나, 술이란 본시 사람이 마시는 것으로, 대저 임금이 큰 재변을 만난 뒤에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며 술을 금한 것은 한갓 문구(文具)일 뿐입니다. ... 만약 흙비를 재이(災異)라고 한다면, 예로부터 천지의 재변은 운수(運數)에 있으니, 운성(隕星 암석이나 금속의 조그마한 조각이 지구 대기로 진입할 때 나타나는 빛줄기)도 그 운수입니다.

흙비도 때의 운수가 마침 그렇게 된 것인데, 어찌 재이이겠습니까?

만약 화재를 재변(災變)이라 한다면, 민가(民家)의 집이 붙어 있고 담이 연하였는데 삼가지 못해서 불이 나자 마침 바람이 불어 연달아 탄 것이니, 족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모두 밝게 드러난 재이가 아닌데 갑자기 술을 금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또 오늘 전지(傳旨)를 내려 술을 금하였다가 내일 비가 내리면 또 금하지 아니하겠습니까? ... 비록 금할지라도 조정 관료나 양반은 적발 당함이 없고 오직 애잔한 일반 백성만 죄를 받을 뿐입니다.”

성종은 "대간이 나로 하여금 비록 재변이 없을지라도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금주령을 내려도 좋다"고 전교하였다. 성종은 도승지 임사홍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 날의 성종실록에는 사관(史官)의 논평이 실려 있다.

"예전에 충성으로 간하는 자를 비방한다고 이르고 깊은 계책을 하는 자를 요망한 말이라고 하였는데, 충성된 말과 깊은 계책을 비방과 요망한 말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첨하는 말로써 스스로 몸을 파는 것이다.

임사홍이 흙비는 운수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고, 화재가 있었음은 민가에서 실화하여 여러 집이 연달아 탄 것이니 족히 괴이할 것이 없다고 하여, 이치에 위반하여 임금을 속였으니, 옛날의 아첨한 말로 스스로 몸을 파는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성종실록 1478년 4월21일 4번째 기사)

 

1) 임사홍은 유자광과 함께 연산군 시절 간신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출신이 다르다. 임사홍은 좌리공신 임원준의 아들이고 부인이 왕족이었고, 유자광은 별 세력이 없는 양반의 서자였다.

2) 효령대군(1396-1486)은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의 형님이다. 임사홍의 장인인 보성군 이갑은 효령대군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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